Award
Special Edition

이중섭(1916~1956) | 1953년

두 어린이와 복숭아두 어린이와 복숭아

두 어린이와 복숭아두 어린이와 복숭아

  • 작가이중섭(1916~1956)
  • 제작시기1953년
  • 크기가로 9.5cm, 세로 12cm
  • 기법종이에 유채
  • 소장처금성문화재단
  • 고유번호타043
  • 두 아이가 마치 대칭을 이루듯 복숭아를 사이에 두고 놀고 있다. 이중섭의 같은 작품이 2점 정도 있을 만큼 중섭이 공을 들인 작품으로 그의 천진난만한 개성이 오롯이 묻어난다. 이중섭은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긴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 작품은 가족 동거,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꿈이 빠른 필치, 정확한 대상 묘사 속에 담겨 있는 작품이다. 


    한편 이중섭에게 천도복숭아는 무병장수의 상징이었다. 절친이었던 구상 시인이 폐결핵으로 수술을 했을 때 그는 이중섭을 그리워하였다. 뒤늦게 병문안을 온 이중섭은 빈손으로 올 수 없어 그림을 준비해 왔는데, 바로 천도복숭아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하였다. 구상은 가난하여 과일을 살 수 없어 복숭아 그림을 그리느라 늦게 자신을 찾아온 이중섭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다. 구상은 세상을 뜰 때까지 이 그림을 서재에 걸어 두고 평생 함께했다고 한다.

  • 대향(大鄕)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생활고로 인해 다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한묵·이봉상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自傳的)인 요소이다. <싸우는 소>, <흰소>, <바닷가의 아이들>, <두 어린이와 복숭아>,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투계> 등은 향토성을 띄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자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박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