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에서 박지(剝地)와 조화(彫花) 기법은 전면에 백토를 하얗게 바른 다음 문양을 새기게 된다. 이 경우는 상감분청 계통의 그릇들에 비해 태토(胎土)를 포함한 재료는 물론 기술 등 전반적인 면에서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태토에 굵은 모래가 섞여 정제되지 않거나 불순물이 포함되어 짙은 녹갈색에서 암갈색으로 나타나는 등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는데 이러한 재질의 비정제성(非精製性)은 문양 기법의 기술적 완성도에서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박지와 조화 기법의 재료와 기술적 약점들은 작은 부분에 얽매이지 않는 거침없는 구상력과 크고 활달하고 대범한 표현 방식으로 완전히 극복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상감 계통의 분청의 입장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조형 정신을 끌어내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이 항아리는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게 사용되던 그릇일 것이다. 다량 생산에 이은 빠르고 거침없는 제작 솜씨가 숨김없이 나타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보여주었다.
분청의 가장 큰 특징은 회청색 또는 회녹색의 태토 바탕과 문양을 표현하기 위해 표면에 씌운 백색의 분장토(粉粧土)와 색상과 질감의 차이에서 얻어진 조형적 효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감청자의 경우 회청색의 바탕에 흑백 상감 문양을 새기고 청화백자의 경우에도 백색 바탕에 청색 문양을 그려 넣는데, 이 경우에는 바탕 색을 바꾸더라도 문양의 효과가 결정적으로 손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청의 경우에는 회청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지는 바탕과 문양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지 않고 조화되면서 전체가 하나의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게 되며, 이러한 성질은 인화분청(印花粉靑)이나 상감분청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특히 박지분청의 경우에 배경과 문양이 가장 효과적으로 조화된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분청 항아리는 그릇의 입체적 형태와 문양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평면이 한 덩어리가 되면서 성공적인 조화를 이룬 예라고 할 수 있다. 항아리의 규모는 조금 작은듯하지만 평편하게 벌어진 구연부와 짧게 좁아든 목, 그리고 탄력 있는 팽팽한 어깨의 둥근 선이 야무지고 단정한 느낌을 갖게 한다. 몸통의 선은 거의 직선적이며 굽 언저리에서 조금 좁아들어 어깨의 팽팽하고 긴장된 선이 다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 굽바닥은 편평하며 내부 측면과 외면에 부분적으로 타날(打捏) 기법으로 성형한 흔적인 격자문(格子文)이 나타나 있다.
문양은 매우 능숙한 솜씨로 순식간에 넣어서 속도가 빠르고 경쾌하며 선과 면이 굵고 넓어서 대범한 느낌을 준다. 처음 백토를 바를 때에도 구연부와 저부를 적당히 크게 남겨두고 어깨와 몸통 전면에 거칠고 큰 붓으로 빠르게 발라서 붓질에 따른 농담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백토를 바른 후, 어깨의 위‧아래 경계선과 저부에 두 줄의 평행선을 둘러 문양대를 구획하고 어깨에는 ‘S’자형의 곡선을 반복적으로 새겨 마치 국화 꽃잎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새기고, 몸통 전면에는 풍성한 모란꽃을 중심으로 마치 두 팔을 크게 벌린 표정의 넓은 잎가지를 새기고 배경은 회녹색의 태토가 드러나게 긁어냈다. 벌려진 모란 잎이 변형되고 확대되어 의식적으로 공간을 분할하였는데, 모란 꽃과 잎의 흰색 분장(粉粧) 부분과 배경이 되는 회녹색 태토(胎土) 부분이 서로 조화되어 새로운 조형으로 인식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태토는 흐린 녹갈색을 띠며 거칠고 백색 모래알이 포함되어 있고 분장한 백토는 대체적으로 유백색(乳白色)을 띠지만 부분적으로 유약이 두껍게 씌워진 곳은 엷은 녹색을 띠고 있다. 유약은 얇게 씌워져 있는데 전면에 걸쳐 미세한 망상(網狀)의 균열(龜裂)이 나 있으며 광택은 은은한 편이다. 굽바닥에 유약을 긁어내고 굵은 모래를 받쳤던 흔적이 있다.
향기로운 침묵 -문정희
단아한 어깨를 따라 흐르는
향기로운 침묵
봄 날, 흰 모란의 꿈을
은은히 가슴 속에 담고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덕없는
참으로 넉넉한 기품이여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야무진 품성은
선비 사이에 앉혀놓아도
조금도 어설픔이 없는
완벽한 조화이니
만개한 모란 꽃잎으로
심연 그윽히 살다가
어느 봄날 하루
아, 하늘 아래 다시
눈부신 꽃 날개를 펼치리